- 유럽 금융을 지배한 유대계 명문가, 황제의 도시 빈에도 뿌리내린 제국의 자본

19세기 중반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가문은 단연 로스차일드(Rothschild)였다. 이 유대계 금융 가문은 단순한 부를 넘어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와 산업,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회 시스템에까지 깊숙이 관여했다. 그 영향력은 단순한 은행 가문이라는 범주를 넘어, 실질적인 국가 운영의 파트너로까지 평가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로스차일드 가문은 18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에서 태어난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가 가문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그는 동전 수집상으로 출발해 유럽 귀족들과의 인맥을 바탕으로 금융업에 진출했고, 특히 신성로마제국 헤센카셀 선제후의 재정고문으로 활동하며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게 된다.
마이어 암셸은 일찍이 ‘가문의 국제적 확장’이라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다섯 아들을 유럽 주요 도시로 파견하였다. 이들이 각각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나폴리,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에 자리를 잡으면서 로스차일드 국제 금융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 ‘다섯 형제 체제’는 유럽 전역에서 전쟁, 국채, 철도, 무역, 산업금융을 아우르는 초국가적 자금망으로 작동하였다.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의 시작 – 살로몬의 빈 진출
오스트리아 분가의 시작은 마이어 암셸의 둘째 아들 살로몬 로스차일드(Salomon Rothschild, 1774–1855)가 맡았다. 그는 1820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에 S. M. von Rothschild 은행을 설립하고, 오스트리아 정부의 국채 발행과 철도 건설, 광산 개발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이 시기 로스차일드 가문은 합스부르크 황가로부터 공작급 귀족에 해당하는 작위를 수여받으며 유대계 금융 가문으로서는 이례적인 귀족 신분을 획득하였다.
특히 오스트리아 북부철도회사(Nordbahn)는 로스차일드 자금이 투입된 상징적 사업이었다. 빈과 보헤미아, 갈리치아를 연결하는 제국 핵심 교통망으로, 제국의 산업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로스차일드는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제국 인프라의 공동 설계자이자 후견인이 되었다.
비엔나에서 ‘그림자 권력’으로 군림하다
19세기 중후반, 로스차일드 가문은 단순한 금융 가문을 넘어 오스트리아 사회 전반을 조율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특히 알베르트 로스차일드(Albert Rothschild, 1844–1911)는 오스트리아중앙은행 이사, 빈 필하모닉 후원자, 빈 증권거래소의 최대 영향력자로 활동했다. 로스차일드는 제국 내 철도, 철강, 보험, 광산, 은행업을 아우르며 오스트리아 최대 재벌이 되었고, 궁전 5곳과 장서 수만 권이 담긴 도서관, 병원, 고아원, 미술관을 직접 운영했다.
그들은 문화예술계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오페라, 미술, 고전음악 후원에 아낌없이 투자하며 당시 빈의 황금기를 견인했다. 로스차일드의 지원 없이는 빈의 예술사조조차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나치 집권과 몰수, 그리고 전후 복권
그러나 이 찬란한 명성은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과 함께 무너졌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자산몰수 대상이 되었고, 가족들은 급히 해외로 피신해야 했다. 가문의 수장이었던 루이스 로스차일드(Louis Rothschild)는 게슈타포에 체포돼 수개월 간 감금되었고, 미국 정부의 개입과 몸값 지급 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몰수 자산 대부분을 회수하지 못하게 했고, 로스차일드 일가는 수십 년간 복권 투쟁을 벌였다. 1999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마침내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약탈한 미술품과 장서를 공식 반환하며 사과했다. 하지만 빈의 수많은 건물과 토지는 이미 국가나 타 재벌가로 넘어간 상태였다.
유산으로 남은 이름
오늘날 비엔나에는 로스차일드 병원(Rothschild-Spital), 장학재단, 역사적 도서관, 그리고 일부 궁전 터가 남아 있다. 대부분은 현재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으로 전환되었으며, 과거 로스차일드의 부와 영향력을 보여주는 유산으로 간직되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제 오스트리아를 떠나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빈에서 누렸던 권위와 규모는 결코 복원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학계와 금융사에서는 여전히 이 가문을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적 자본"으로 평가한다.
"오스트리아의 역사에서 로스차일드를 빼면, 철도도 없고, 금융도 없고, 예술의 후원도 없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 가문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자본 파트너였고, 비엔나라는 도시 자체를 만든 유산의 일부였다.